2008년 1월 7일

언어장애자의 고백

관련 글: 저는 말더듬이 입니다. 긴 방황의 시간이었습니다 (글쓴이가 글을 삭제했네요)

이 글을 보고서 제 얘기를 적어봅니다. 고백하건대, 저 또한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심각한 유창성 언어장애를 겪었고 아직도 100% 완쾌된 상태는 아닙니다.

유창성 언어장애에는 다양한 증상이 있는데, 저의 증상은 말막힘입니다. 특정 상황에서 전혀 말이 나오지 않는 증상입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국민학교 다닐 때 발병을 했고, 이후에 전혀 대중 앞에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대화는 가능했고요(이 경우에도 어느 정도 장애는 있었죠).

“여보세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집 전화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 급우들 앞에서 전혀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자기소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발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수학여행 때 밤에 인원 체크를 하는데 번호를 말하지 못해서 반 전체가 기합을 받기도 했죠. (그리고 이런 에피소드는 천 개가 넘을 겁니다)

이런 증상은 대중 앞에서 경직되거나 떨리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대중을 앞에 두고 얘기를 해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대중 앞에서 책을 읽는 것은 100% 불가능합니다.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없는 부분입니다.

언어장애 문제로 인해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국민학생 때부터 웅변 학원을 몇 번이나 다녔고, 중학생 때는 서울에 몇 군데 없는 언어치료 학원도 다녔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스피치 교육업체인 한마음변론학원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학원을 다니면 조금 괜찮아졌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요요현상처럼 더 심해지곤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죠.

그래서 그런 학원을 불신하게 되어서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 때도 여전히 힘들어서 2학년 때는 학교를 그만 두려고 한달 이상 학교를 가지 않기도 했었죠. 참 사연이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중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보려고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졸업을 하고 대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대학생 때는 다행히 대중 앞에서 책을 읽을 일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상처로 남은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제가 가입해서 활동하던 모문학 동아리의 정기모임에서 회장 형이 회지에 실린 시를 읽어보라고 했는데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너무 창피한 나머지 그 다음 날로 동아리 활동을 그만 둔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기억은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죠.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다들 저를 이상한 언어장애가 있는 친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괴심과 극도의 우울함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결국 죽지는 못했습니다. (죽을 운명이 아니었나 봐요. ^^)

그러던 제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자신이 있는 분야가 생기고 사람들 앞에서 그것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되면서 “정말 조금씩” 나아졌죠. 언어장애 문제와 관련해서 극적인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1996년에 한국컴퓨터에서의 했던 비주얼베이직 강의로 기억합니다. 그것이 대중 앞에서는 처음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었는데, 정말 많이 망설였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당시 저는 개발자로서 비주얼베이직을 너무 좋아했기에, 신버전의 새로운 기능들을 업계에 널리 알리고 싶었죠. 그래서 용기를 내어 강의를 맡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신이 나서 강의를 참 잘했습니다. 한국컴퓨터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내 강의였는데 20시간 가까이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강사료도 꽤 받았었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정말 잘 알고 있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잘 할 수 있구나.”

제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자유의지로 하는 말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등 이미 정해진 말은 여전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휴대폰이 대중화 되어서 “여보세요”라는 말을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고요. 어렸을 때 이후로 전화를 참 싫어하지만 휴대폰은 어떤 의미에서 저에게 반가운 기기입니다.

이후 제가 말막힘이 발생하는 상황과 아닌 상황을 정확히 깨닫게 되어 콘트롤을 하고 있습니다. 링크한 글에도 있다시피 어렸을 때 고쳤더라면 완쾌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저에게는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짐입니다. 다만 과거와 달리 90% 정도는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의 장애에 대해 몇몇 사람들한테 얘기한 바 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세히 얘기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중고등학생 시절의 동창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요.

혹시 유창성 언어장애 증상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연락을 주십시오. 제 경험을 좀 더 세밀하게 알려드리고 제가 했던 모든 노력에 대해 공유하겠습니다.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한국도 선진국들처럼 언어 치료가 조기에 가능한 환경이 빨리 조성되어(학교마다 언어치료사를 배치하는 등) 성인이 되어서까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심리적 상처로 남고 사회 생활에도 많은 지장을 주니까요.

무엇보다 심리적 데미지로 인한 자아 불신 및 사회성 상실이 심각한 문제이죠.

PS: 제가 발병한 원인 및 치유 과정에 대해서 보다 깊은 얘기들이 있은데 지면 관계상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연락주세요.

댓글 7개:

익명 :

류한석님 토론회나 강연하는 모습보면,
말씀 완전 잘하셔서 전혀 몰랐습니다.
컴플렉스는 정말 사람을 한없이 무너뜨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고 일어나는 모습은 더욱 사람을 아름답게 합니다!

Eureka :

도대체 누가 류한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언어장애라고 생각하겠읍니까?
그런 걱정을 하지 마시고 그냥 하시던 대로 하시면 아무도 전혀 개의치 않을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가 실제적으로 문제가 되는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는것"이 문제가 되는것이라 봅니다.

바비(Bobby) :

To Young님/ 심리적 외상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육체적 상처보다도 더 치유하기 힘듭니다. 저의 일부만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고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 말고 다른 분들께는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등의 표현은 삼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더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Nomad :

안녕하세요
RSS로 님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님과 같은 증세를 겪고 있습니다.
말이 안 나오는 문제였죠, 전화, 차례로 번호 외치기, 전부 비슷한 문제였습니다.
저는 대학로에서 미친듯이 외치기도 했습니다. 소리치고 그럼 말씀대로 좀 나아졌습니다. 그리곤 다시 제자리 ..
그래서 말 안하는 직업을 찾아 봤죠, 어린 마음에 소프트웨어 개발은 말이 필요없을 것 같았죠, 하지만 개발은 소통의 연속이란것을 알았죠, 지금도 문제를 안고 있지만 전화 공포는 아직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요원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전화를 못해서, 그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뭐 아무튼 후회는 없습니다. 그 덕에 책을 무지하게 좋하게 되어 책을 많이 읽으니 세상사 공평하지 않습니까.?

아침에 가슴이 시원합니다.

드러내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긁어 주셨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익명 :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셨네요.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힘이 됐을꺼에요 ^^

익명 :

님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저도 언어장애 같은게 있는데요...

남들 앞에서 떨리거나 머리속이 하얗게 되서 말을 잘 못하는건 있지만 책을 읽거나 전화를 받아서 여보세요 하는건 다 하는데요...

그러나 남들에 비해서 말을 많이 안하고 그래서 그런지 목소리도 작고 말을 하게되도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기 때문에 주변에서 의사소통에 좀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

그래서 제 스스로 다니게 된건 아니지만 님처럼 한마음변론학원에 2달 정도 다닌 적도 있는데 좋아지지는 않더군요...

님이 어떻게 노력해서 지금처럼 되셨는지 알려주시면 저한테도 도움이 좀 될듯 하네요...

익명 :

아.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지금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안되요~ 저의 경우는 국민학교 3학년까지 말을 못하고 어버버거렸습니다. ㅠㅠ 어머니만 알아들으셨죠. 직립보행을 5살에 성공했으니...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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