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9일

국무총리표창 수상 소식,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상념

소식을 전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방송에 나올 예정이기에 블로그를 통해 먼저 알려 드리기로 했습니다. 오늘 제가 규제개혁 공로자로 선정되어 국무총리표창을 받았습니다. 기업호민관실에서 IT 분야를 맡아서 스마트폰/공인인증서를 비롯한 여러 규제를 풀기 위해 노력을 해왔는데 그에 대한 포상이었습니다.

주된 내용을 말씀 드리면, 지난 3월말에 스마트폰에서 30만원 미만의 금액은 공인인증서 없이 결제가 가능하게 됐고요(관련 기사 참고). 당시 해당 규제가 풀려서 스마트폰 앱과 모바일 웹에서 결제가 가능하게 됐었죠. 이 부분은 다들 체감하고 계신 상황입니다.

위의 내용이 발표된 직후에,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제를 풀기 위해 공인인증서 규제 TFT가 만들어졌고 TFT를 통해 금융위, 인터넷진흥원 등과 지속적인 회의를 거쳐 합의안을 도출하였습니다. TFT 활동의 성과로서 얼마 전에 PC와 스마트폰, 그 외 디바이스에서 공인인증서 이외의 방식으로도 결제가 가능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습니다(관련 기사 참고).

물론 가이드라인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타협의 산물이니까요. 그리고 후속 조치로 공인인증서 이외의 결제 방식에 대한 기술적인 평가 작업이 필요해서 아직 규제개선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는 상황인데요. 조만간 체감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규제가 풀렸다고 해도, 금융위가 적극적으로 해당 내용을 추진해야 하고 또한 금융기관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야 하므로 시간은 걸릴 겁니다. 저는 공무원도 아니고, 금융기관 종사자도 아니니,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거 같습니다. 사용자 편의성과 안전성 간의 밸런스를 맞춘 방식들이 도입되어 스마트폰을 비롯한 새로운 플랫폼에서의 상거래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여기까지는 배경을 전한 것이고요. 사실, 제가 그리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포상을 받게 되어 좀 민망합니다. 누군가 포상을 받아야 하는데 제가 한 일이 타이밍이 맞았던 거 같습니다.

제가 받은 국무총리표창은 하단과 같습니다. 현재 제가 연구소 외에 벤처기업인 레몬컨설팅, 온오프믹스의 이사도 맡고 있는데, 포상 추천이 연구소 만들기 전에 있었던 관계로 레몬컨설팅 이사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4년 전 삼성전자 재직 시절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데(한명숙 총리 시절), 이상하게도 국무총리상과 인연이 있나 봅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랬는데 오늘 역시 상을 받아도 마음이 복잡하네요(당시와는 또 다른 이유로).

공교롭게도 오늘이 정운찬 총리가 사퇴의사를 밝힌 날이죠. 포상 행사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서, 사퇴 기자회견 직후에 포상 행사를 진행 했습니다. 사표 수리 전까지는 공무를 수행하신다는데, 사퇴 의사를 밝힌 후 첫 공식 행사였습니다.

포상자는 총 9분이었는데 다들 공무원, 군인, 협회분들이었고 일반 기업인은 저 혼자였던 거 같습니다. 포상 행사 후에 국무총리실에서 정운찬 총리와 환담 시간을 가졌고요. 대기업, 중소기업의 상생 관련된 얘기들이 주로 오갔습니다.

요즘 시국이 복잡하고, 국무총리실도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상황인지라, 지금 같은 시기에 상을 받게 된 게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실 지난 4월에는, 아버지께서 4.19 혁명 50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으신 바 있습니다(관련 기사 참고).

아버지는 경북대 법대에 재학하던 당시, 대구에서 4.19 혁명을 주도하다 옥살이도 하고 그러셨는데,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국가유공자가 되셨죠. 국가유공자에 대한 혜택이 참 많더군요. 사업 실패로 오랫동안 고생만 하시다 말년에 좋은 선물을 받으신 것이지만, 맘껏 기뻐하기에는 시국이 복잡해서 조용히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고3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가족들 모두 많이 힘들게 지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계속 혼자 살아왔고(잠시 형제들과 함께 산 정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오랫동안 소원했는데 수년 전에 복원해서 지금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단점들을 참 싫어했는데, 아.. 사회생활 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더군요(그 DNA가 그 DNA). 그래서 어느 순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제가 싫어하던 그 모습들을 말에요.

이 자리를 빌어, 늦었지만 공개적으로 아버지께 축하 드리고 싶네요(제 블로그를 구독하고 계시거든요).

아버지 얘기를 하다 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독립운동 하시다 소련(사할린)으로 징용 가셔서 끝끝내 돌아오지 못하셨죠. 그곳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문법책인 <조선문전>을 만드셨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년 전 한글날에 대통령표창을 받으신 바 있습니다(할아버지에 대한 글).

친척들은 제가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데 저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밖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죠.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반골 정신이, 아버지께 그리고 제게 이어지고 있는 건 확실한 거 같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얼마전 번역한 책 "슬랙"이 일부 대기업의 인사팀에서 금서가 되었다는 소식도..)

오늘은 새삼 그걸 확인한 날이었습니다. 포상을 받았어도 별로 기쁘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그건 현 시국이 복잡해서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4대강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전 자연은 있는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이 현 정부에서 포상을 받는 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비록 IT 규제개혁 공로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이런 복잡한 마음이 들지 않은 사회가 좋은 사회인 거 같습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 앞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면서, 벤처들도 도우며, 이 상태로 계속 자유롭게 살아갈 예정입니다. 큰 일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누구 눈치도 안보고 억압받지 않고서 살 겁니다.

끝으로 포상과 관련하여 복잡한 제 감상과는 별개로, 규제개혁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기업호민관실의 이민화 호민관님, TFT 활동에 많은 지원을 해주신 규제총괄정책관 김효명 국장님, 기업호민관실 초기부터 여러모로 친절하게 도와주신 윤세명 사무관님, 그리고 TFT에서 고생하신 고려대 김기창 교수님, KISA 강필용 팀장님, 경북대 배대헌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PS: 지금 밖에는 비가 오네요. 지금 분위기에 맞는 Bee Gees의 And The Sun Will Shine을 전하며..

2010년 7월 13일

매킨토시의 탄생 비화, “미래를 만든 Geeks”

이런 책이 국내에서 출간되다니 깜놀했습니다. 책의 주제는 “매킨토시 탄생 스토리”입니다. 아예 책의 제목을 그렇게 붙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책의 내용은 맥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세세하게 어떤 일들이 있었고, 맥 출시 후의 이야기까지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거의 야사 수준의 에피소드들도 많이 나옵니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험은 부족했으나 위대한 일을 하려고 했던 이 젊은이들이 오늘날 일상에서 쓰이는 핵심 기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회상하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들이 쓴 글과 그림을 보며, 혁신의 규칙이 돈이 아니라 내면의 보상에 의해 이끌어지던 매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책을 보면, 최상의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만들어지는 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맥 프로젝트에 대해서만 나오지만 아이폰 프로젝트 또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잡스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거 같습니다. 슈퍼 영리해진 게 다를 뿐.

맥 팀원들 (출처- http://www.folklore.org)

이 책은 특히 개발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만일 8비트 PC 시절부터 프로그래밍을 했던 사람이라면 아주 딱 맞습니다. 정겨운 애플II 얘기도 많이 나오고요.

이 책은 최상의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와 경영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기술적인 내용이 상당하기에 용어와 스토리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필히 감안하세요.

이 책에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그의 독특한(?) 성격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한 부분들이 많죠. 스티브 워즈니악도 등장하고, 빌 게이츠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과 함께 제 의견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81년 2월, 맥 프로젝트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버드 트리블이 잡스의 재능을 정의했다.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 스타트렉에서 나온 용어). “잡스가 있는 자리에서는 현실이 이리저리 변해. 사실상 누구에게나 거의 무엇이든 납득시킬 수 있어. 잡스가 주위에 없으면 왜곡장이 차츰 사라지지.

또한 잡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보통 시시하다고 대꾸해 놓고는 그 아이디어가 정말 마음에 들면 정확히 1주일 후에 돌아와 그 아이디어를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이야기해.”

이 대목만 보면 잡스가 부하직원의 공과를 가로채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아이디어라는 측면에서는 물론 그렇겠지만), 잡스는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팀원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관심이 많아서, 맥 케이스의 안쪽에 팀원들의 이름을 새겨 제품을 양산하기도 했으며(잡스는 팀원들이 예술가이며 예술가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맥 출시 직후 사전 예고 없이 팀원들에게 무상으로 맥을 증정하기도 했습니다. 제품 발표회에서 팀원들을 소개시키는 것 또한 잡스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맥 케이스 안쪽에 새긴 맥 팀원들의 서명 (출처- http://www.folklore.org)

거의 30년 전의 일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런 식으로 직원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경영자를 만나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잡스는 독재자였고 애플에서 가장 성격이 나쁜 사람으로 공인 받고 있었지만, 팀은 놀라울 정도로 수평적으로 운영되었고 잡스 자신이 틀렸을 시에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고 최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감수했다고 합니다. 그런 잡스이기에 변덕이 심하고 괴팍해도 팀원들 대부분이 잡스를 인정하고 따랐던 것이죠.

맥 팀의 디자이너 수잔 케어가 그린, 잡스 아이콘 (출처- http://www.folklore.org)

저는 최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직 문화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리더가 확고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도, 개개인이 최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조성한 것이 현재의 애플을 만든 힘이 아닐까요?

얼마전 잡스는 애플이 가장 오래된 벤처이며 여전히 벤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타기업으로서는 어떻게 흉내를 내기도 힘든 그런 조직 문화입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속단하지 마시길.

책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일화도 나옵니다. 애플II에 탑재된 애플 소프트 베이직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마이크로스프트는 애플의 잘나가는 써드파티 회사였고, 그로 인해 맥 출시 전부터 맥용 오피스 개발에 많은 지원을 받기도 했죠.

맥을 개발할 당시 애플의 캐시카우는 애플II였는데, 당시 애플은 마이크소프트와 애플 소프트 베이직의 라이선스를 갱신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즈음 맥 팀원인 돈 덴먼이 맥 베이직를 개발했는데 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베이직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때 빌 게이츠의 비즈니스 감각이 빛을 발합니다.

1985년 6월, 빌 게이츠는 애플을 재정적으로 압박했고 그 점을 철저히 이용했는데 그의 무자비한 사업 수완을 잘 보여준 사례다. 빌 게이츠는 돈이 개발한 베이직이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애플 소프트 베이직 계약을 갱신하는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애플이 맥 베이직을 포기하기를 요구했다. 그런 다음 게이츠는 맥 베이직을 애플로부터 1달러라는 가격으로 사서 묻어버렸다.

그는 또 애플 소프트 베이직(맥이 애플II를 대체함에 따라 1~2년 안에 쓸모 없어질 터였다) 계약 갱신을 이용해 매킨토시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대한 영구적인 라이선스를 얻어냈다. 이 계약은 1985년 11월 존 스컬리가 추진했는데 애플 역사에서 단일한 건으로 최악의 거래였을 것이다.

애플이 마이크로소프트와의 GUI 소송에서 패소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위의 계약 때문이었습니다. 법원은 애플이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부주의하게 영구적인 라이선스를 준 것으로 판결한 것이죠.

색다른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책의 저자는 1982년 7월 앨런 케이(객체 지향 프로그래밍과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선구자)의 세미나를 듣게 되는데, 그때 메모한 내용이 스캔되어 책에 그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웹에도 텍스트로 소개되어 있으니 한번 보십시오.

Alan Kay's talk at Creative Think seminar, July 20, 1982

사람들이 SNS에서 자신의 아이덴터티를 리얼 아이덴터티가 아니라 환타지 아이텐터티로 가져가는 경향, 그리고 웹 2.0적인 공유의 개념을 이미 30년전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와우, 역시 대단한 앨런 케이입니다.

그리고 앨런 케이는 다음의 명언도 남겼죠.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맥 팀은 엄청난 고생을 하고 결국 맥이 출시됩니다. 맥의 초기 광고를 한번 보시죠. 그 이후의 성과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맥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에서의 인상적인 데모를 위해 맥 팀은 여러 준비를 하는데 그 내용 또한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으로 데모를 준비한 적이 여러 번 있기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984년 1월, 잡스는 드디어 대중 앞에서 매킨토시 첫 데모를 합니다. 바로 하단의 동영상이 그것입니다. 예전에도 몇 번 보았는데요. 잡스가 왜 가방에서 맥을 꺼내는지, 왜 포켓에서 3.5인치 디스켓을 꺼내는지, 그리고 데모 애플리케이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고서 보니까 훨씬 감동적이더군요.

여러분도 한번 보시죠. 그리고 책을 읽은 다음에 다시 한번 보십시오. 프로젝트 스토리를 이해한 후에, 정말 행복해하는 잡스의 미소를 음미해 보세요.



이 책에는 정말 좋은 내용들이 많아서 8비트 키드인 저로서는 소름 돋으며 읽은 부분들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제품의 개발을 꿈꾸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1983년 12월, 잡스와 전체 맥 팀원들 (출처- http://www.folklor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