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소비자를 기만하는 ‘KT의 정보유출 사과 메일’

KT 휴대폰 가입자 870만명의 개인정보(휴대폰번호, 이름, 주민번호, 그 외 가입관련 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서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자세한 사항은 하단의 기사를 참고하세요.

관련기사:
[KBS] KT 휴대전화 가입자 8백만 명 정보 유출 파문
[한겨레] 개인정보 유출 의심신고 KT본사서 묵살

확인해보니 제 정보도 털렸습니다.

아무리 보안시스템을 잘 갖추어도 뚫릴 수는 있습니다. 더군다나 국내 기업들은 보안시스템의 수준이 부실한 경우가 많아 이제는 이런 뉴스가 나와도 새삼스럽지 않을 지경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KT가 해킹 당했다는 뉴스를 처음에 접했을 때도 그리 놀랍지가 않더군요.

이런 사건들에 익숙해지다니.. 서글픈 현실이죠. 어쨌든 국내 기업들의 부실한 보안시스템에 조금 열을 받기는 했습니다(1차 열 받음).

그런데 KT가 엄청나게 늦장 대처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조금 더 열을 받았습니다(2차 열 받음). 그리고 정보 유출이 이루어진 시점 이후부터 이용자들의 신고가 급증했음에도, 이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 열을 받았습니다(3차 열 받음).

그런데 확 열 받은 계기는 이것입니다. KT 웹사이트에서 제 정보가 유출됐는지 확인하니 다음과 같은 팝업이 뜨더군요. 제가 빨간 줄로 표시한 부분을 보세요.


하하, 전량 회수조치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종이 서류도 아니고, 유출자가 유출을 하자마자 하나도 못 써먹은 상태에서 PC를 압수했으면 모를까, 유출자가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5개월 동안 타업체들에 정보를 팔아 7억원의 이득을 취했고 그 정보를 사간 사람들이 또 그걸 어떻게 써먹었는지 팔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슨 회수 조치가 됩니까?

이건 둘 중의 하나입니다. KT가 디지털 정보의 무한 복제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없든가, 아님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자일 가능성은 거의 0이니, 당연히 후자입니다.

정보 유출 그 자체보다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소비자를 기만하는 KT의 태도가 더 불쾌합니다(4차 열 받음).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지만, 이내 바쁜 일에 묻혀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KT의 메일을 받고서 다시금 폭주하여 이 글을 씁니다. 하단이 메일 원본이고 역시 빨간 줄로 표시했습니다.


해당 정보가 모두 회수되다니요? 제발 이런 식으로 소비자 기만하지 마세요(5차 열 받음).

해킹 사건 자체보다 진실하지 않은 모습이 더욱 불쾌합니다. 전량 회수되었다느니, 이런 표현 쓰지 마세요. 보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당연히 KT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실이라도 얘기하세요.

진실을 알리고 고객을 생각한다면, KT의 문구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정보를 모두 회수하면 좋았겠으나, 고객님 및 다른 고객님들의 정보는 이미 수많은 업체들에게 7억원에 팔린 상황이라서 전량 회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디지털 정보의 특성상 복제되어 퍼진 정보는 사실상 회수할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깊이 사과 드리며 보상안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PS: 현재 KT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죠(관련기사).

2012년 7월 20일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떤 분의 죽음

정말, 많이, 슬픈 하루입니다.

오늘 오전, 제가 예전에 모셨던 직장상사이자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계신 한국계 미국인이신데, 너무 늦게 암을 발견한 나머지 딱히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몇 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산악자전거 타기를 즐기시고 무척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갑자기 너무 일찍 가셨어요.

아마도 제 블로그나 여타 글들을 이것저것 보신 분이라면, 제게 상당한 영향을 준 직장상사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기에서는 P상무님이라고 지칭할게요.

저는 사회생활을 20여년간 하며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고, 그 동안 평범한 직장상사를 비롯해 사기꾼, 위선자, 싸이코 등 다양한 유형의 직장상사들을 만났습니다. 높은 자리로 갈수록 이상한 분들이 많더군요. -> 이것이 이 사회가 이렇게 삭막해진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사람이 모르고 순진해서 착하기는 쉬워도, 닳고 닿은 경험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법을 다 알면서도 착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그리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영악한 처세를 하기 마련이죠. 지속적으로 스킬이 향상되기에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깔아뭉개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고, 보다 높은 권력과 부를 지향하며 추악한(하지만 같은 레벨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P상무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저와는 2003년에 만나 3년 동안 같이 일했습니다. P상무님은 사내정치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한결 같이 인간을 중심에 둔 관리와 의사결정을 하신 분입니다. P상무님은 칼텍에서 학부를 나오고 스탠포드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분인데, 단지 학력적인 똑똑함이 아니라 진정한 통찰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또한 윗사람에게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으셨고 잘못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부하직원에게 사과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렇게 성숙한 사람이 있다니! 그에 비하면 나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 제가 3년간 옆에서 지켜보면서 또한 온갖 시련의 상황에서 어떤 길을 가는 가를 보고서 판단한 내용입니다. 그런 분을 이제는 다시 만나 뵐 수 없게 됐네요.

마지막 만남이 생각납니다. 올해 초 P상무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제가 팔당 근처의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 후에 일산에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일산까지 데려다 드렸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호수공원에 가서 함께 산책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P상무님도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모르던 때였고 당연히 저도 몰랐고요(하지만 그때 이미 간암 말기셨죠).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날은 그냥 시내에서 만나면 됐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였는데, 왠지 야외로 모시고 가고 싶더라고요. 왠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팔당까지 갔고 또한 일산까지 거리도 상당했는데 일부러 모셔다 드린 거고 산책도 왠지 해야 할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토요일에 출국하시기 전에 잠시 뵈었는데, 괜히 선물도 드렸습니다.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닌데 왠지 그러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결국 그 날이 마지막 만남이 됐네요.

사람에게는 어떤 느낌이 있는 거 같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말이죠.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은 미국에 갈 사정이 안 되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면서 P상무님을 추모합니다. 끝으로, 하단의 글은 돌아가시기 전에 P상무님으로부터 받은 메일 내용 중 일부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연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천국에 천사가 한 명 늘었습니다. P상무님, 이제는 마음 편히 쉬시길 바랄게요.

Thanks for praying for me. It pains me to see you so sad, my dear friend. Don't be too sad for me. I am not. I am at peace with this situation.

I struggled with the mystery of life and the universe all my life.

I have been blessed in life with great, loving people (like you), I experienced things to die for, seen and felt glories indescribable. And I am experiencing a perfect peace.

Hanseok, I pray that you too will have this peace and joy. You will see that there is little room for sadness..

PS: 추모곡은 Andy Williams가 부르는 Danny Boy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