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5일

광복절, 그리고 할아버지가 남긴 정신적 유산

이 얘기는 저와 친한 이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얘기입니다만, 광복절을 맞이하여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블로그에 적어보게 되었습니다.

관련기사: [한겨레] 광복뒤 사할린 조선어교육 실상 ‘햇볕’

위의 기사는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얘기입니다. 할아버지는 제 아버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일제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끌려 가셔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저도 사진으로 밖에는 본 적이 없죠.

다만 어렸을 때 주변 친척들로부터 제가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고, 러시아에서 찾아온 할아버지 유품들 속에서 발견된 일기장의 필체가 저와 상당히 흡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조선문전’은 할아버지가 육필로 직접 쓴 것으로,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보았는데 육필로 그 모든 내용을 정성껏 쓰면서 할아버지의 기분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리더군요. 서울대에서 기증을 계속 요청하고 있는데, 아직 결정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 정말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절절하게 묻어납니다.

결국, 일제시대는 제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채 고학을 하며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그리움을 갖고서 성장했고, 아버지상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이 부족한 채로 저를 비롯한 자식을 네 명이나 나았지만, 결국 저의 아버지 또한 제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것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나와 저, 막내 동생은 아버지와 오랫동안 무척 소원하게 지냈죠. 수 년 동안 말 한마디 안 한적도 있고. 하지만 몇 년 전 제가 주도적으로 관계를 개선해서 이제는 그냥 여느 집처럼 지내고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상처들을 완전 잊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그 상처들을 여기에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저의 가족사에는 질퍽한 내용도 많고 짧은 얘기가 아니라서 여기에 다 쓸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은 나름의 ‘자기치료’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죠.

아버지는 그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남긴 상처의 영향으로 제대로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컸습니다만, 30세가 넘어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긴 뒤 생각해보니 그건 아버지 탓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된 거 같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저는 할아버지/아버지 대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죠. 그치만 아직은 자신이 없나 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겠죠. 그래도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 같았던 누나가 40세가 넘어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겨우 두 달 되었습니다만), 언제나처럼 앞날은 알 수 없는 거 같습니다.

과거는 중요합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가 만든 것이니까요. 그것을 인정해야 내 자신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있겠지요. 하지만 미래의 나까지, 과거가 지배하게 두어서는 안되겠지요. 적어도 그것을 알고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거 같아요.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만, 변화를 위한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아미고~, 그런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분들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상념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에 함께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시작은 꿀꿀해도 결론은 희망입니다. ^^

댓글 4개:

익명 :

솔직한 얘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많은 부분 동감하면서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3~40대 세대들은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듯합니다. 저또한 아버지하고의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차라리 과거를 잊으려 애쓰는 편입니다. 과거가 현재의 나 자신을 만들었다는 말씀이 맞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비관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것보다는 과거의 안좋은 기억에 얽매인 자신을 조금씩 풀어나가는 것이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하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입장에 빗대어 말씀드리는 것이라서 얘기가 빗나간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익명 :

나이가 30대 중반에 이르니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정말 부러울정도로 편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산전 수전 공중전을 겪은 분들도 있고...(저도 그리 평탄하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신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은 언젠가 크고 중요한 일을 맡기고자 단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차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류한석 님이 부럽습니다. 현재의 지위나 위치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이런 훌륭한 분을 할아버지로 두고 있다는 것이...

익명 :

자기치료라는 부분에 공감하게 됩니다. 싸이미니일기장, 네이버블로그, 티스토리 등으로 스스로 정리되지 않은 머리 속 이야기를 여기저기 옮기며 써 왔는데, 다시 한 번 시도해 봐야겠네요. 온라인이 좋은 것은 한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찾아가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점일 수도 있겠네요. 한석님의 글로 가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익명 :

젊은 나이에 큰일을 감당하신 할아버지와,젊은 나이에 큰일을 감당하려 노력하는 닮은꼴 손자,,,,
더이상 말이 필요없네요.

근데, 가정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이나 크시네요.
가볍게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필요이상?두려움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그리 옳다는 생각은 안드네요.

외롭지않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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