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0일

첫 결혼식 주례를 서다

아직 한 것은 아니고 내일(토) 합니다. 내일도 비가 온다니 비 오는 날의 결혼식이 되겠네요.

제 나이 41세. 뭐, 주례를 서기에 좀 어린 나이이기는 하죠. 하지만 인터넷에서 보니 30대 후반에 첫 주례를 서신 분도 있더군요. 전 그래도 40대이니까요.

그런데 주례를 맡은 저나 이 얘기를 듣는 여러분이나 황당할 수 밖에 없는 건, 제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이라는 겁니다!

결혼 트라우마가 있어서 아직 결혼을 못했어요. 앞으로도 딱히 예정은 없고요. 할 가능성이 절반, 안 할 가능성이 절반 그렇네요. 결혼 한다고 해도 공개적인 결혼식은 안 할 예정이고요. 그런 제가 주례를 맡게 되었으니, 오죽하면, 어떤 사연이 있길래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 사연은 신랑되는 이(이하 J)와의 인연 때문인데, 10년 전인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당시 저는 모기업의 CTO를 맡고 있었고, 그때는 커뮤니티 운영 등 개발자로도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던 J는 IT 업계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고, 동생한테 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제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J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대학을 중퇴할지 말지 그리고 장사를 할까? IT쪽으로 취업을 할까? 등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장사를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을 했던 거 같고요.

저를 만나서 물어 보더군요. “제가 어떻게 하면 개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당시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졌지만, 당시에도 한국 현실에서 개발자 직종은 별로 추천할만한 건 아니었습니다. 상위 10% 내에 들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거나 그게 아니면 학력, 과거 경력, 태도, 소셜스킬 등 뭐라도 남다른 게 있을 때 그나마 커리어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게 개발자 직종입니다. 물론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겠지만, 개발자 직종은 일반적으로 입문이 쉬운 반면 생명이 짧아서, 오래 생존하고 출세하려면 남들과의 차별성이 특히 중요합니다.

거기에다 J의 전공은 전산은커녕 이공계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개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는 상태였죠. 그래서 “대충 직업을 구하려고 하는 거면 다른 일 하는 게 낫다. 이 직종은 업계가 독해서 스스로 잘 관리하지 못하면 돈을 못 벌고 몸도 망가지고, 별 생각 없이 일하다간 40세 넘으면 아주 곤란해질 수도 있다.”라고 말해주었죠.

제 얘기를 다 들은 후에도 나름의 의지를 피력하더군요. 그래서 도와주려는 마음 일부, 니가 할 수 있겠어?라는 마음 일부, 또 리트머스 테스트에 통과하길 바라는 마음 일부를 가지고서 당시 만났던 장소 근처에 있는 반디앤루디스 서점에 데려갔습니다. 서점에서 OS, 웹프로그래밍, 오피스 등 관련 서적 네 권을 사주면서 만일 한달 내에 이 책들의 내용을 모두 독파한다면 그때 가서 다음 스텝을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런 식의 도움 내지는 시도를 한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 다음 단계로 진입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달 내에 책 네 권을 독파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개발 관련 책이라서 내용을 정독해야 하고 페이지도 상당하니까요.

책은 사주었지만 거의 기대는 하지 않고서 잊고 있었는데, 정말 한달 뒤에 연락이 왔습니다. 공부를 다했다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만나서 몇 가지 확인을 해보았는데 완전 초보치고는 이해력이 뛰어나다고 판단을 했고, 특히 그 의지를 높이 사서(의지가 강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든 드라이브하죠), 제가 CTO로 있던 회사에 말단 신입으로 고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마치라고 조언을 해주었죠. 가진 게 몸뚱어리 밖에 없는 사람이 이 독한 한국사회에서 기회에 대한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학력, 경력 등을 잘 관리해서 몸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게 당시의 제 지론이었습니다. (그런 차별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겠죠. 그런데 어떻게 된 게 10년이 지났는데 이 사회는 점점 더 독해만 지고 있네요.)

어쨌든 제 말이 통한 것인지 J는 이후 2년 넘게 회사와 학교를 병행하였고 결국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포기할뻔한 학교에 다시 복학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이번에 결혼하는 신부 S입니다. 인연은 인연인 것이죠.

J와는 일한 지 얼마 안되어 제가 회사를 옮겼고, 그 후 함께 일한 적은 없습니다. 함께 있었던 시기에도 저는 주로 팀장들과 일을 해서, 사원인 J와 직접적으로 협업을 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일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렇듯이 저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인해 J 또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제가 불과 4~5년전까지만해도 지금보다 훨씬 성격이 안 좋았거든요. 제 기준으로(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주관적인 기준이었을 뿐이에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심하게 몰아붙이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인생의 가치관을 바꿀만한 몇 가지 계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과거를 절절하게 반성하게 됐고, 지금은 거의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모든 내용은 제가 겪은 것이고 반성의 경험을 반영한 것들이죠.

하여튼 저와의 짧은 직장 생활 이후 J는 몇 번의 이직을 거쳐(중간에 회사 잘못 옮겨서 엄청 고생을 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NHN에서 포털 부문의 개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NHN에서 20여명만 뽑은 우수사원상을 받기도 했다는 군요. 책임감과 의지가 무척 강한 친구입니다. 다만 일에 너무 몰입함으로써 마음의 여유, 건강 등을 해치기 쉬운 타입인데 나이 먹으면서 나아지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어찌됐건 IT 전공자도 아니고 어떤 IT 교육기관도 다니지 않고서 오로지 독학으로, 즉 스트리트 파이터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집안을 책임져온 J가 대견합니다. 헝그리정신의 표본. 그리고 현재의 모습보다 앞으로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 친구입니다.

그런 J가 어려운 시절에 만난 인연인 S와 8년간의 연애 끝에 이번에 결혼을 하는 겁니다. 평소에 저와 J는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닌데, 갑자기 연락을 해서는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해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고 J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줄 분들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주변에 있고, 부탁하면 흔쾌히 해주실 텐데 왜 하필이면 제게 부탁을 하는 건지.

몇 번 사양을 했는데 J와 S를 만나서 그들의 의지를 확인한 후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 왜 맡았을까? 내가 미쳤지.."하는 마음)

제 생각에는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항상 그렇듯이) J는 결혼식을 자기 인생의 중요한 마일스톤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제게 주례를 부탁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네요.

아, 그래도 사람이 살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건데, 굳이 초심을 그대로 실행하는 걸 보면 J의 스타일을 알 수 있어요. 그런 J의 스타일이 지금의 J를 만든 거겠죠.

사람의 마음만큼 간사한 것도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잘되면 자신이 잘나서 잘됐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굳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저를 주례로 세우는 걸 보면 J는 참 독특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저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잘 알면서, 결혼식 주례와 같은 어려운 부탁을 맡겨 제게 부담을 주는 J에게 조금 불만을 표하고 싶기도 합니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이 타인의 결혼식 주례를 서며 갖게 될 미묘한 느낌을 J는 이해할까요? 거기에다 저처럼 감정이 예민한 성격의 사람이라면요?

사실 제가 수 천명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생방송을 할 때도 전혀 떨리지 않는 사람인데, 요 며칠은 잠이 안 오더군요. 내일 주례 전에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할 듯.

아, 이 결혼식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마치 제가 결혼하는 심정. 그런 부담감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혼인서약, 성혼선언문에 주례사까지 나름 신경 쓸 게 많네요. 하여튼 첫 주례를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어요.

끝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고 결혼하는 멋진 커플 J와 S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부디 이 세상이 우리를 고단하게 할 지라도 언제까지나 서로를 지지하는 소울메이트로 남아주세요. 공개적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링크를 알려 드립니다.

J와 S의 결혼

제가 보내는 축가는, 존경심과 부러움과 축하의 마음을 담아 Elvis Presley의 Hawaiian Wedding Song(가사).

댓글 10개:

archmond :

그분들의 앞날에 축복을...^^
오늘도 재밌게 읽고 갑니다.

익명 :

몇달째 매일 들러보고 있지만, 처음 댓글 남겨봅니다.
이 글을 읽으니 과거 이 일을 시작할때의 초심과 어려웠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나름 괜찮은 직장에 자리를 잡고 미국으로 건너와 개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안정된 생활에 나태해진 저를 돌아보게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네요.
아! 그리고, 나이는 좀 어리지만, 곧 9번째 결혼기념일을 맞는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결혼은 "인생의 가치관을 바꿀만한 몇 가지 계기" 중 첫번째가 될겁니다.

skkong :

재미있는 사연 잘 읽었습니다. ^^;
결혼하시는 분들 축복기원하구요...
주례 잘 봐주세요. ^_^;

삼에이치정보통신(주)/설립대표&상임고문 :

~진심어린 감동이 있는 내용입니다~그 진심이, 미혼자의 주례일지라도 J와S의 일생을 시작하는 축복의 시간에 훌륭한 주례사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는만큼 값진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익명 :

그런 스토리는 몰랐네요.세상에 인연을 고마웠던 일들을 소중히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죠. j씨가 참 멋진 분이에요.

Unknown :

전 결혼식 사회를 몇 번 보았는데 첨에는
남의 결혼식 망칠까봐 제 결혼식 보다 몇 배는
더 떨리더군요.
바비님 본인 결혼식 때는 덜 떨리실꺼예요. *^^*

익명 :

비 전공자로서 IT에서 버티면서 힘이들때 큰힘이 되어주신것 때문에 주례를 부탁한것 아닐까요. 예전에도 그리고 주례도 좋은 일 하셨습니다. ~ 참. 두분은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익명 :

결혼하시는분, 일면식 없는 분이지만, 같은 분야 개발자로.. 존경스럽네요..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꿈꾸는자 :

음. 류한석님 덕분에... 저도 주례를... ~.~
선례를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우연과필연 :

흠...

저의 12년전의 모습을 생각나게하네요^^
내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주신분입니다.
결혼식 주례를 저보다 12살 많으신 띠동갑이신 교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아마 류한석님보다 나이가 어렸을 거예요^^ 하지만 인상이 조금 많아 보이는 타입이라서 다들 모르셨지요^^
저도 주례는 제가 고집했고 지금의 아이엄마는 탐탁치 않아했지요. 하지만 지금도 다시한다면 그분에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런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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