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0일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떤 분의 죽음

정말, 많이, 슬픈 하루입니다.

오늘 오전, 제가 예전에 모셨던 직장상사이자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계신 한국계 미국인이신데, 너무 늦게 암을 발견한 나머지 딱히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몇 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산악자전거 타기를 즐기시고 무척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갑자기 너무 일찍 가셨어요.

아마도 제 블로그나 여타 글들을 이것저것 보신 분이라면, 제게 상당한 영향을 준 직장상사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기에서는 P상무님이라고 지칭할게요.

저는 사회생활을 20여년간 하며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고, 그 동안 평범한 직장상사를 비롯해 사기꾼, 위선자, 싸이코 등 다양한 유형의 직장상사들을 만났습니다. 높은 자리로 갈수록 이상한 분들이 많더군요. -> 이것이 이 사회가 이렇게 삭막해진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사람이 모르고 순진해서 착하기는 쉬워도, 닳고 닿은 경험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법을 다 알면서도 착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그리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영악한 처세를 하기 마련이죠. 지속적으로 스킬이 향상되기에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깔아뭉개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고, 보다 높은 권력과 부를 지향하며 추악한(하지만 같은 레벨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P상무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저와는 2003년에 만나 3년 동안 같이 일했습니다. P상무님은 사내정치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한결 같이 인간을 중심에 둔 관리와 의사결정을 하신 분입니다. P상무님은 칼텍에서 학부를 나오고 스탠포드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분인데, 단지 학력적인 똑똑함이 아니라 진정한 통찰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또한 윗사람에게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으셨고 잘못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부하직원에게 사과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렇게 성숙한 사람이 있다니! 그에 비하면 나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 제가 3년간 옆에서 지켜보면서 또한 온갖 시련의 상황에서 어떤 길을 가는 가를 보고서 판단한 내용입니다. 그런 분을 이제는 다시 만나 뵐 수 없게 됐네요.

마지막 만남이 생각납니다. 올해 초 P상무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제가 팔당 근처의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 후에 일산에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일산까지 데려다 드렸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호수공원에 가서 함께 산책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P상무님도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모르던 때였고 당연히 저도 몰랐고요(하지만 그때 이미 간암 말기셨죠).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날은 그냥 시내에서 만나면 됐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였는데, 왠지 야외로 모시고 가고 싶더라고요. 왠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팔당까지 갔고 또한 일산까지 거리도 상당했는데 일부러 모셔다 드린 거고 산책도 왠지 해야 할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토요일에 출국하시기 전에 잠시 뵈었는데, 괜히 선물도 드렸습니다.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닌데 왠지 그러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결국 그 날이 마지막 만남이 됐네요.

사람에게는 어떤 느낌이 있는 거 같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말이죠.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은 미국에 갈 사정이 안 되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면서 P상무님을 추모합니다. 끝으로, 하단의 글은 돌아가시기 전에 P상무님으로부터 받은 메일 내용 중 일부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연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천국에 천사가 한 명 늘었습니다. P상무님, 이제는 마음 편히 쉬시길 바랄게요.

Thanks for praying for me. It pains me to see you so sad, my dear friend. Don't be too sad for me. I am not. I am at peace with this situation.

I struggled with the mystery of life and the universe all my life.

I have been blessed in life with great, loving people (like you), I experienced things to die for, seen and felt glories indescribable. And I am experiencing a perfect peace.

Hanseok, I pray that you too will have this peace and joy. You will see that there is little room for sadness..

PS: 추모곡은 Andy Williams가 부르는 Danny Boy 입니다.

댓글 13개:

nalm :

P상무님의 명복을 빕니다...

새우깡소년 :

P상무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재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돌아가신 K대 경영대의 기인수 교수님을 그와 같은 분으로 제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다. 한석님이 쓰신 글만 읽어도, P상무님이 많은 분들에게, 이 세상에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데니 :

비록 얘기로만 P상무님에 대해 듣고 뵌적은 없지만 마지막 메일만으로도 감히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P상무님을 위해서라도 슬퍼는 하되 그 슬픔을 오래하지는 마세요.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익명 :

저는 그런 분을 모셔본 적이 없지만 그런 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mistic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임백호 :

아,,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소중한 경험, 공유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P상무님의 명복을 빕니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저렇게 의연할 수 있다는 것이 저를 되돌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익명 :

박 상무님 모습 잘 기억납니다.
모시고 업무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류 소장님 글을 읽으면서 너무 귀한 분이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곁에서 그런 분을 뵙고 있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구요.
류 소장님과 저희 후배들이 귀한 삶을 이어 살아가는 것이 고마운 선배님에 대한 도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규성-

익명 :

상무님.. 하늘나라에서 평온하시길 기도합니다.
마지막 메일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선배에게 소중한 멘토이자 정말 정신적으로 존경하시던 분이였는데, 선배도 부디 잘 이겨내길 바랄께요.
그래도 마지막 만남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예요.
사람이 늘 현재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인것 같아요.

Unknown :

P상무님의 명복을 빕니다.

바비(Bobby) :

To 댓글을 남겨주신 모든 분/

일부러 추모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잘 기억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려요.

charlz :

아...미국에 있으면서도 소식을 더 모르네요. 이런 일이...사모님과 아이들을 걱정 많이 하셨을텐데. 예전에 처음 뵐때 연세에 비해서 주름이 많으셔서 농담하고는 했었는데, 아마도 그런 인간적인 모습들이 외모에 쌓인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뒤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익명 :

I think you may find this is so random as it's been so long. However, as I remember clearly the momments you told me about this man, I can't help leaving comments here tonight. He is in peace now.


I would have been better if I knew that was our last moment.......
I will pray for your wellness.......

From such a distanc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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